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 (문단 편집) == 영향 == 이 사건 이후 백악관에는 많은 항의 방문이 이어졌고 시민 및 학생운동 단체 대표들 또한 이를 규탄했다. 일주일 후 워싱턴에선 15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. 결국 닉슨 대통령은 학생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게 되었지만 계속되는 학생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급급했고 학생들의 흥분과 분노를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분노를 유발시켜 전국적으로 400만 명의 대학생 및 고등학생이 동맹 휴학에 들어가면서 나라가 뒤집어졌다. 하지만 이것은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만의 일이었고 [[반공주의]]에 젖어 있던 기성세대는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 듯하다. 당장 사건 다음 날 갤럽 여론조사에서 '''58%가 학생들의 잘못이라고 대답했고''' 주방위군의 잘못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11%에 지나지 않았다. 켄트 주립대생들이 시위를 더이상 못하게 총에 맞아 더 죽었어야 한다는 폭언이 쏟아지는가 하면 일부 학생들은 자기 가족에게 절연당했다.[* Means, Howard. (2016). ''67 Shots: Kent State and the End of American Innocence''. Boston: Da Capo Press. ISBN 978-0-306-82379-4. pp 171-186]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서 상당수 학생들이 견디지 못하고 이탈하고 끝까지 운동을 이어간 사람들은 그렇게 고립당한 끝에 과격화되거나 지하화되어[* 8월 24일 [[위스콘신 대학교]] 매디슨 캠퍼스에서 육군수학연구소가 입주한 스털링 홀에 1톤 트럭 폭발물 테러를 시도한 사건 등. 육군연구소는 멀쩡했고 지나가던 물리학 교수가 사망했다.] FBI 지명수배자가 되는 등 인생이 망했다. 일본의 [[전공투]]가 무너진 과정과 거의 같다. 다만 닉슨 행정부도 경찰의 발포와 캠퍼스의 소요사태에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고 캠퍼스 불안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([[윌리엄 스크랜턴|스크랜턴]] 위원회)를 만들어 대학 소요사태의 해결책을 모색했다. 위원회는 발포가 정당하지 않았고 전쟁의 지속이 폭력적 학생운동을 야기한다는 결론을 내었다. [[조선일보]]는 명백한 [[국가폭력]]인 이 사건 때문에 미국의 반전운동이 철퇴를 맞은 것을 두고 "폭력 시위가 줄어든 계기(...)"라고 높이 평가했다. [[http://news.chosun.com/site/data/html_dir/2006/11/08/2006110860471.html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